top of page

태양계 밖에는 자의든 타의든 홀로 남겨진 외행성이 있기 마련이다. 궤도를 도는 행성들을 바라보며, 우직하게 서 있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틈을 주지 않는. 궤도를 벗어난 이탈은 태양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지훈은 세상에 꽂힌 외행성이었다. 남들 가는 궤도를 함께 돌지 못하고 어딘가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존재하는. 따라 돌지 않았고, 그렇다고 존재를 자랑하거나 끼어들지도 않았다. 외딴섬이라 볼 수도 있었고, 발견되지 않도록 몸을 숨긴 미지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가 학교를 관뒀을 때 반응한 건 아주 소수의 친구였다. 한 명은 마라탕을 먹다가 손을 멈췄고, 한 명은 손이 삐끗해 게임오버를 당했으며, 다른 한 명은 웃음을 거두고 처음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너 진짜 세상을 따돌리기로 한 거야? 그 키키고모리 된 거야?”

“히키코모리.”

“그래, 그거.”

 

키키고모리는 뭐냐. 어디서 들어보긴 했고, 알지는 못하고. 무식한 놈. 지훈은 너털웃음을 지었고, 사실 그건 아주 시원함을 담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걸 알았지만, 걱정보다 괜찮은 결정이었다.

 

“너 집에서 쓰레기에 파묻혀서 사는 건 아니지.”

“주기적으로 청소해 줘야 하나.”

“요즘은 카카오톡 선물하기에 청소특공대 이용권도 판대.”

 

그래, 지훈이 생일엔 그거 해주자. 소년들은 진심으로 걱정한 것치고 표현에 서툴렀고, 지훈은 그들의 서툰 애정을 곧잘 받았다. 누구든 걱정할 수밖에 없긴 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뜯어말렸지만, 똥고집을 부린 건 단 하나였다.

 

나는 세상의 외행성이라서.

 

타인도 함께 걷는 궤도를 절대 걸을 수 없는 성정이라서. 공부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학교에 있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나. 외행성인 이지훈은 다만 그것을 하러 떠날 뿐이다.

 

“청소는 매일 할 거니까 돈 모아서 나 장비사는 거 도움 좀 줘.”

“게임머니는 부자인데.”

“미친놈,”

 

지훈은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사실 진짜 재능인진 모르겠고, 그나마 궤도를 벗어나 할 수 있는 일이 음악을 만들어보고 그걸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려 반응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은, 가르쳐 줄 수도 없는 이지훈이 발견한, 또 안착하기로 한 외행성.

 

“나 이제 간다. 1년에 딱 세 번 너희 생일 때만 밖에 나올 거니까 잘살아라.”

“햇볕 없으면 비타민 부족해!”

“어~ 먹으면 그만~”

 

지훈은 친구들을 등지고 집으로 걸어갔다. 후련하다. 녀석들은 매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것이고, 지훈은 그 연락을 꾸준히 읽을 것이다. 가끔 툭 하고 답을 던지면 셋이 몰려와 생존 신고했다고 고독사는 면했다고 할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세계와 동떨어진 기상천외한 친구를 만났으니, 뭐 그들이 견딜 무게지. 그들은 주어진 궤도를 열심히 돌며, 가열차게 살아가기를.

 

그렇게 지훈은 완벽하게 고립으로 들어갔다. 남들이 보기엔 완벽한 고립이었으나, 지훈에게는 아늑하기만 했다. 조용했고, 푹신했고, 몇 평 되지 않은 공간이 지훈의 세계였다. 나름 밥도 잘해 먹었고, 매일 청소를 했다. 그리고 깨달았지. 집에서 지내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바쁜 사람이다.

 

사람들은 자퇴한 지훈을 보며 폐인이 되기로 작정했냐고 수군거렸으나, 아마 그들보다 성실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집안일은 절대 무료 노동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왜 밥을 세 끼나 먹어야 하고, 빨랫감은 꾸준히 나오며, 닦아도 먼지는 쌓이는가. 지훈은 저에게 주어진 작은 방조차도 보살피기 버거울 때가 종종 있었다.

 

“팔자 좋게 부모님이 집안일해 주는 녀석들보다는 내가 어른이다.”

 

밀대로 방 구석구석을 밀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왜 이리 웃긴 지. 이걸 마치고 오랜만에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 올 생각이다. 히키코모리치고 쓰레기 버리러 가는 일 정도는 하니까.

 

재활용할 것들과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들고서 내려와 분리수거장 앞에 서자 마주한 건 커다란 박스더미, 악취 나는 쓰레기 무덤. 지훈은 쓰레기를 그대로 차곡차곡 쌓았다. 박스류를 정리하던 중에 무언가가 발밑에 떨어졌다. 툭. 그건 지훈이 어떠한 개인의 행성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마음을 지워버리는 행위가 되었다.

 

“이런 걸 그냥 버려도 되는 거야?”

 

그건 연노란색 일기장이었다. 일기에는 대단하게 뭘 꾸며놓은 건 아니었고 휘갈겨 쓴 글씨는 투박한 편이었다. 휘갈겨 쓴 글씨의 마지막은 항상 같았다.

 

「그래도 오늘 재밌었다 그치.」

 

긍정적인 사람이군. 어떤 날에는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어떤 날엔 등굣길 만원 버스에 치여서 내리지도 못해 지각을 했다는데. 그 모든 것이 추억이 되고 재미있는 기억이 될 거라면서 결론은 오늘은 재밌었다고 끝나는 일기가.

 

“뭐 이렇게 인생에 추억이 많아.”

 

지훈은 저도 모르게 일기의 끝까지 훑어보고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일기의 주인은 오지 않았다. 이건 너무 실례되는 행동이니 안 보이게 버려줘야겠다고 다짐하던 그때, 일기의 끝, 그다음 장에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워! 뭐, 뭐야!”

 

글씨는 평소처럼 춤을 추듯 앉아 내렸다.

 

「오늘의 일기. 홍지수 개자식이 커피믹스 찬물에 타 먹기 내기를 하자고 했다. 이길 수 있었는데, 걔가 꼼수를 쓴 게 분명하다. 최승철이랑 날 엿먹여보려고 작당 모의를 한 것이 분명하다. 둘 다 내일 나한테 죽었다. 녹차 티백으로 뺨을 때릴 것이다. 그래도, 오늘 그런 추억이 생겨서 재밌었다. 그치?」

 

지훈은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한참을 노려봤다. 없던 글씨가 절로 생겼다. 실시간으로 누가 적고 있는 것처럼. 이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클리셰처럼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러나, 눈이 본 것을 외면할 수 있진 않았다.

 

“뭐야. 이거. 실시간이야?”

 

일단 일기장을 버리는 건, 보류해야겠다. 지훈의 손에는 쓰레기 대신 연노란색의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밖에서 무언가를 들인 기억은 아주 오래 전인데, 밖에서 무언가를 들여와 버렸다. 그것도 귀신 들린 일기장을.

 

남들이라면 무당이나 갖다줬겠지만,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믿은 지훈은, 책상에 일기장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이건 하나의 확인 절차이다. 일기장 주인이 원하면 저 멀리 시골집에 가서라도 불태워주면 그만이지.

 

「혹시 일기장 주인 되시나요. 제가 당신 일기를 볼 수 있어서요. 놀라지 마시고요. 저도 일기장에 새 글이 써지는 걸 보고 폐기하려다가 잠시 들고 왔으니까요.」

 

답이 없었다. 그래, 누군가의 일기를 기적적으로 엿보게 된 것만으로도 만화에서나 가능한 상황이지. 지훈은 일기장을 펼쳐놓고 그대로 콜라 한 캔을 가지러 갔다. 그 사이에 일기장 위로 물음표가 여럿 떠다녔다.

 

「뭐지? 마법사예요?」

「우와, 이것도 보이나?」

「뭐라도 적어봐요」

 

그가 돌아왔을 때는 한 페이지가 전부 그의 낙서로 가득 차 있었다. 커피믹스 알갱이 맛이 여전히 난다는 말도, 녹차티백 적혀서 뺨 때리면, 찹! 하고 찰지게 붙어서 기분이 더러워진다는 말도. 별별 쓸모없는 대화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더니 마지막 가운데엔 크게 쓰여 있었다.

 

「대답 좀 해! 보고 있으면!」

 

지훈은 콜라를 내려놓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미안. 콜라 가지러 갔다 왔어.」

「오오, 제로? 펩시? 뭐지? 아무튼 어디 사는 누구인진 몰라도 제 일기를 염탐하셨으면 님도 똑같이 해줘야져.」

「음. 난 일기 안 쓰는데.」

「왜? 비밀 친구 생겼는데 싫어요? 같이 비밀 이야기 하자. 서로 누군지도 모르잖아.」

 

비밀 친구. 별로 내키진 않았고, 얼떨결에 일기장에 의해 말려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상대측에서 먼저 과감하게 이름을 보냈다.

 

「열아홉 윤정한」

「열여덟 이지훈」

「좋아. 우리 이 모든 건 비밀이야. 서로 찾아내려 하지 말기로 해」

「그래. 비밀. 그런 게 주는 맛이 또 있지.」

 

참 밝고 맑은 사람이네. 외행성은 처음으로 궤도를 돌고 있는 한 행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궤도 안으로 진입하진 못했고, 돌고 도는 행성의 근처를 한번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쏜살같이 흐르는 별들의 길 사이에서 외행성은 엉뚱하게 제 길을 가면서도 한 번씩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외행성 탈피

w. 조각배(@kimjjubjjub)

 

고립된 외행성에 찾아온 별빛은 꽤 파급력이 높았다. 검은 세상에서 총총 빛나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정신을 번쩍, 또 번쩍하게 만드는 준재의 등장. 본디 별과 별은 충돌하면 재앙이 된다는데, 지훈의 꼴이 딱 그 꼴이었다.

 

정한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그가 하루를 마치고 나서 일기장을 펼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지훈은 곡 작업도 했고, 가사를 쓰기도 했으며, 그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집안일을 해냈다. 정한을 마주하기 전의 생활과 동일한 단조롭지만, 지훈의 인생에서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삶.

 

그러다 해가 지는 것을 확인하면, 지훈은 내심 미소 지었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을까. 이 생각이 든다는 건, 이미 절반은 망했다는 뜻인데. 지훈은 아직 그걸 지적해 주는 이가 없어 자각하지 못하고 열심히 스며들고 있었다. 콜라 한 캔, 아주 큰 책상의 듀얼 모니터와 각종 장비. 헤드셋을 쓰고 이것저것 비트를 찍어내다가 시계를 보면 10시를 넘을 때가 많았다.

 

그때부터는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멸망을 앞둔 세계를 바라보는 무력한 인간 하나가 되어 다가오는 별을 받을 준비를 했다. 일기장을 펼치고, 펼친 일기장에 뭐라도 써지기를 기다렸다.

 

「지훈이. 하이.」

「오. 오늘은 좀 늦네.」

「최승철이 컵라면 먹자고 꼬셔서.」

「그래? 형부터 써. 오늘도.」

 

짧게 구석에 필담을 남기고 나면, 정한은 일기를 썼다. 지훈이 경험할 수 없는 바깥의 이야기. 요즘은 무슨 맛 간식이 유행한다던가. 유행하는 게임은 뭐고, 학생들은 요즘 어떤 옷을 입는지.

 

자신을 스스로 고립 속에 두고 유영하는 이지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세계. 가진 신발은 슬리퍼 몇 짝. 트레이닝복, 반바지. 이런 것이 전부인 지훈에게는 모든 것이 별천지다. 그러나 잡고 싶은 별은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윤정한이 있는 세계이기에 한번은 손 뻗어보고 싶은 별이라서일 것이다.

 

당연히 제 삶에 얼쩡거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신경 쓰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 마음이었다. 타인의 삶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본 건 처음이라서. 제 오랜 친구들도 보여주지 못한 영역을 비밀 친구라는 이름으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버리곤 너도 내놓으라 협박하는 모습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난 오늘 곡 하나 안 풀리는 걸 완성했어. 사실 완성이라고 하긴 어색하고 손 좀 봐야 할 것 같긴 해.」

「너 근데 멋지다. 학교 안 가고 하루 종일 음악 하는 거. 그거 엄청 재능 있는 거잖아.」

「보통 사람들은 이런 놈을 외골수라고 하지.」

「야. 나는 할 거 생각 안 나서 소 키우고 공장 가서 일해야 하나 생각 중이야. 되고 싶은 게 없는 삶은 그런 네가 부럽단다」

 

“뭘, 또 그렇게까지 치켜세우나.”

 

친구들이 몇 번이고 음악의 신, 권위자라며 띄워줘도 그게 그리 마음 편하진 않았던 지훈이기에 특히 자신에 대해서 야박하게 구는 성정은 열여덟 청춘이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이라 머리를 긁적였다. 구구절절 써서 내가 그리 잘난 놈이 아니라는 걸 피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결국 정한이 주는 칭찬을 잔뜩 받아버릴 수밖에 없는 이지훈이 되었다고.

 

「보통 무난하게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밥 안 굶고 이것저것 잘할 수 있어.」

「좋아하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난 장난치는 것 말고는 없는데.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그걸 하고 살지.」

 

열아홉의 정한은 그런 말을 해도 항상 밝았다. 그래, 지훈이 말이 맞아. 난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어. 오늘도 재미있었다. 너도 재밌었으면 좋겠다! 일기의 끝은 항상 재미있었다.

 

인생이 즐겁고 재밌다는 게 가장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의 달란트라는 걸 죽어도 모르는 윤정한. 복에 겨운 사랑스러운 윤정한. 그렇게 생각이 흐르고 나서야 지훈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사랑스럽다고 말한 거야.

 

그 대상이 얼굴도 모르고 이름만 아는 윤정한이라서. 지훈은 그날 처음으로 아끼는 장비 위로 머리를 퍽 박고 혹이 났다. 제정신이 아닌 소년의 마음이 엉키고 엉켜 만들어낸 굉음이 헤드셋을 타고 울렸다. 쿠쿵. 치지직 쾅. 마음을 대변하는 소리까지도 그는 천재 음악가라 불릴 만했다.

 

「나, 이제 수능 완성 풀어야 해.」

「그래. 내일 만나.」

「그래! 내일 만나 지훈이!」

 

형은 하루하루 흐르는 게 불안하진 않을까. 수험생이면 줄어드는 카운트가 무서워서라도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랄 텐데. 지훈은 요즘 시간이 흐르는 재미로 살아간다. 곁에서 자꾸 긍정적인 말을 해서 그런가, 모든 것을 그래도 재밌었다. 나름의 추억이다. 퉁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겼다.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을 붙들고 있다가도 시계를 보면, 지금 점심시간이겠군. 또 한창 일하다 시계를 보면, 지금 학원 갔겠군.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궤도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으나, 언제든 별의 길을 가늠하는 외행성이 있었다. 우주를 부유하면서도 치열하게 달리는 별에게 설핏 웃으며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지훈의 마음이 어떤 줄을 모르는 정한은 이제 털어두지 않아도 좋을 것들까지 털어두었다. 당장의 불안, 고민, 걱정까지도. 원래 그런 말을 막 털어두냐는 물음에 그는 그건 지훈이라서, 내 비밀 친구라서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란 답이 나왔다.

 

누군가의 특별함이 되는 건, 결국 그 사람에게 나는 찍혔다는 뜻이고, 그게 긍정적인 특별함이라는 건 그 사람 역시 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뜻인데.

 

그래서 쉽게 너라서, 네가 특별해서. 이런 말을 하면 안된다. 그런 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사랑에 물들어버리는 말이니까.

 

그날부터 지훈은 음악에 자꾸 정한을 집어넣었다. 정확히는 정한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제가 만드는 음악에 마음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찌나 열심히 빚었는지. 또 얼마나 깨부수고 다시 쌓았는지. 윤정한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윤정한이 수능이라는 제도에 얽매여 좀비가 되어갈 때, 이지훈은 정한의 하루를 위로하며, 그를 향한 사랑을 노래로 썼다. 지웠다가 쓰고, 보다 좋은 멜로디와 가사가 있을까 싶어 다시 지우고 쓰고. 치열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이룬 끝에, 그들이 마주한 11월. 정한은 딱 한 줄을 적었다.

 

「11월 모의고사 같았어. 그래서 재밌었다? 넌 오늘 기도 좀 했어?」

「작업했지. 기도는 무슨」

「나 잘되라고 냉장고에 떡이라도 붙여놓고 기도하지.」

 

기도 대신 형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형은 웃을까? 어떻게 웃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모르니까. 다만 마음으로 그가 웃으면, 꽃이 터지는 소리가 날 것이라고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숙제 끝. 완성.」

「오~ 지훈이~ 결국 오늘 우리는 해낸 거네. 재밌는 날이었어 오늘.」

 

맞아. 재밌었어. 지훈은 처음으로 제 삶이 재밌었다고 동조할 수 있었다. 정한을 생각하며, 또 잘되기를 바라며. 계속 웃을 수 있도록 제 목소리로 노래를 녹음했다. 어딘가에 절대 올리지 못할. 누가 봐도 나 첫사랑 진행 중이에요. 하는 곡.

 

「그럼, 곡 다 썼으면, 안 바빠?」

「왜? 일기 쓸 시간은 많은데.」

「나, 너 보고 싶어져서. 이제 나 시간 많거든?」

 

나와줄 수 있어?

 

그 말이 지훈의 가슴에 콕 박혔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만남을 바란 건 아니다. 만난다고 해서 제 마음이 꺼지고 사라지고 퇴색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밖에 나간 적이 너무 오래 전이라서. 난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편의점 이상 나가 본 기억이 1년여 전이라고. 그 밖으로 나아서 다른 별들이 질주하는 은하계로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나 다음 곡 작업 의뢰 들어와서 바빠질 것 같은데.」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시간 내줄 수는 없나?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게!」

「미안. 나 밖에 나가는 게 좀 불편해서. 다음에.」

 

그래 다음에. 내가 용기가 생기면. 좀 더 근사한 사람이 되면, 형을 좋아해도 좋아하는 티를 덜 낼 수 있다면. 그럴 만큼 대가리 좀 큰 놈이 되면. 그때는 용기를 내볼게. 지훈이 담은 미안은 절대 정한에게 다 닿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정한은 콧대만 높은 찌질이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나인 걸 뭐 어쩌겠어.

 

한 번도 멋있다고 여겨본 적 없는데. 잘난 것 하나 없이 멋지다는 소리 좀 들었다고 진짜 멋진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걸. 지훈은 그대로 더 답을 듣지 않고 일기장을 덮었다.

 

내일은 진짜 수정해야지. 이 마음을 담아서 기쁘고 벅차지만, 어딘가 슬픈 곡을 써야지. 누굴 들려줄 것도 아니지만, 찌질한 당사자를 위한 셀프 위로다. 이건.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 전까지는 누구도 손대지 못할 시기이다. 하루에 20시간을 잠들어있어도 누군가 뭐라 하지 않았고, 종일 나가 놀아도 탓하지 않았다. 족쇄가 풀리니 망아지처럼 뛰어노느라 정한 역시 일기 쓰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어색한 거절 이후로 다시는 찾아가고 싶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말은 없었지만, 이따금 재미있었다는 일기를 남기는 정한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유행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대리경험 하며 별들의 세계에 잠시 들어갔다 온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 해가 지나고 앞자리가 바뀐 윤정한. 여전히 앞자리가 1에 머물러있는 이지훈.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정한은 일기를 썼다.

 

「내일은 졸업식. 엄마도 아빠도 바쁘다고 해서 그냥 혼자 친구들이랑 사진 찍고 돌아올 것 같다. 눈이 내리는데, 내일 그치면 세상이 구정물이 되니까, 내릴 거면 포근하게 많지 않게 내일까지 하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학교에서 모든 짐을 다 뺐다. 시원섭섭하지만 재밌었다. 그치?」

 

아무도 오지 않는 졸업식. 홀로 보낼 윤정한. 지훈은 다급하게 서랍을 뒤졌다. 손을 헤집어 잡히는 것을 들고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게 맞냐. 미친놈아. 너 어쩌려고 그래.

 

정말 어쩌려고 그랬나. 지훈은 다시금 생각했다. 가진 것이라곤 롱패딩에 털 슬리퍼, 츄리닝. 주머니 속에는 USB. 그 안에는 지훈이 정한을 좋아하게 되면서 묻은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윤정한을 위한 노래.

 

일기를 보자마자 지훈은 USB에 곡을 담았다. 포장할 만한 상자가 마땅치 않아 주머니에 넣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누구보다 빠르게 꽃집에서 꽃다발을 샀다. 정한이 사는 곳까지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그게 문제 될 일은 아니지. 가서 후일이 문제다. 내가 그 이지훈이라고 밝힐 수 있을까.

 

미리 꽃다발을 사서 그런지 지훈에게 꽃 사라는 이야기를 하며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왁자지껄 소음이 귀를 때렸다. 고요한 외행성을 건드리는 침입자들. 솔직히 불쾌했지만, 지훈은 교문을 넘어섰다.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을 찍는 가운데, 지훈은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무작정 이곳에 왔음에 다시 자신을 탓했다.

 

“그래서 윤정한이 누군데.”

 

정한의 얼굴을 모르니까. 줄 수가 없다. 교실로 돌아갈까. 적어도 3학년 1반인 건 아니까. 그렇게 건물로 몸을 돌리려는 차에, 저 멀리서 아주 큰 외침이 들려왔다.

 

“야! 윤정한! 빨리 오라고!”

 

윤정한.

 

“승철아. 쟤 잡고 있어. 몸에 눈 넣게.”

 

정한이 형.

 

“아악! 이 자식들아! 이 못된 자식들! 악마 같은 놈들!”

 

아.

망했다.

 

“씨발…. 예쁘다고는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

 

이지훈은 절대 그 별과 충돌 할 수 없다. 마주할 수 없는 존재에게 할 수 있는 건, 자연의 섭리에 있어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지훈은 재빨리 건물로 뛰어 올라가 USB와 꽃다발을 두었다. 자리를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윤정한의 필체로 낙서 된 책상.

 

「졸업 축하해요」

 

사랑은 깊어져만 가고. 내리는 눈은 굵어져 가고. 떠나는 발걸음마다 찍히는 발자국. 아직 누구도 식이 끝나지 않아 내려가지 않았던 그 길을 유일하게 내려가며, 눈이 잔뜩 들어와 빨개진 발바닥은 울고 있었다.

 

**

 

윤정한은 내심 알았을 것이다. 돌아왔을 때, 제 자리에 있던 꽃다발. 그리고 USB. 그런 걸 줄 사람은 이지훈밖에 없다고. 그러나, 왜인지 지훈을 추궁하지 않았고, 지훈도 갔다 왔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졸업식이 즐거웠고,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였다는 일기와, 오늘은 무슨 작업을 했다는 일기. 평소와 같이 누군가는 삶에 대한 반짝임을 누군가는 삶에 대한 무미건조한 보고를. 그러다 잠시 필담을 나누고 잠들었다.

 

한번 얼굴을 알게 되니, 이 사람이 얼마나 찬란한 세상을 살아가는지 가늠이 되는지라, 지훈은 정한의 일기에서 항상 그의 웃음을 상상했다. 찰나지만, 또렷하게 형상기억으로 남아있는 하얀 눈밭의 개구진 웃음. 그건 겨울이 지나도, 봄이 와도 마찬가지로 하얀색 배경과 반사된 빛으로 뿌려진 반짝이 잔뜩 바른 웃음이었다.

 

세상에 얼마나 즐거운 일이 많으면. 그런 찬란한 청춘이라면, 뭘 해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며. 지훈은 비교하기 싫어도 가끔 정한의 찬란함이 생각나 거울을 보는 일마저 쉽지 않았다. 볼을 쭉 늘리고서는 멍청한 것. 하며 양치하는. 그런 멍청이 짝사랑.

 

소년 정한에서 청년 정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맞이한 그는 여전히 밝았으나, 투정이 늘었다. 오늘은 이래서 힘들었고, 저래서 힘들었고. 여전히 나는 그래도 오늘 즐거웠다는 이야기가 붙었지만, 그 윗줄이 전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 아니라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열아홉까지는 스물이 되면 세상살이가 다 편해질 것처럼 굴더니, 스물은 이제 어른이니까 널 책임지란다. 그 간극이 대체 동전 앞뒤 바뀌듯 바뀔 수가 있나. 과도기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내버려진 청춘. 물론 그 길을 거부한 지훈은 제 길만 걷다 자주 옆을 봤다.

 

돌부리에 넘어지는 윤정한이 있을까, 건너기 힘든 거센 물살을 만난 윤정한이 있을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른이 뭐길래. 열아홉은 절대 위로하지 못하는 스물이 있다. 그건 온전히 윤정한의 몫이고, 하필 궤도를 이탈한 이지훈은 죽어도 끼어들 수 없는 트랙 위였다.

 

「나 어른 안 해.」

「해야지. 어른 됐는데.」

「넌 어른 되지 마라. 이 형이 아주 말할게.」

「해야지. 언제까지 애로 살 순 없지」

 

대화가 뚝 멈췄다. 아무래도 공감 능력 상실한 답변이었지? 지훈은 머쓱하게 다음 줄로 변명이라도 하려고 펜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밑에 한 줄이 생겼다.

 

「맞아 너 애잖아. 겁쟁이」

 

겁쟁이. 그래. 나를 잘 표현하네. 그동안의 일기만으로 나를 간파했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맞다는 의미로 동그라미를 치니, 다시 한 줄이 생겼다.

 

「나한테도 겁쟁이 할 필요는 없었는데. 멍청이.」

 

나 자러 갈래. 오늘은 재미없는 하루야.

 

청천벽력 같은 소식. 윤정한이 처음으로 재미없는 하루라는 말을 했다. 지훈은 그 부분에 놀랐지만, 멍청하게도 그 앞의 맥락은 읽지 못했다. 초점은 거기에 가 있는데도. 아마 예상도 못 한 거지. 겁쟁이 할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 향하는 시간과 장소는 눈 내리는 겨울의 학교 운동장이었다는 걸.

 

자러 간다는 말이 봄 잠이라도 자는 건지, 여름잠이라도 자는 건지. 정한이 일기장에 등장하는 빈도가 확실히 줄었다. 어떤 날엔 술이라도 진탕 마셨는지 조금 비뚜름한 글씨체로 안녕을 말했고, 어떤 날엔 신경질적인 필체로 다 짜증 나서 엎어버리고 싶다고 한 줄을 남겼다.

 

무슨 일인데. 괜찮아? 이런 것을 물을 만한 사이지만, 그걸 묻는 데에 한 번의 용기가 필요했다. 한 번 해내고 나면 다음은 쉬우나, 처음이 항상 어려운. 술기운에 꼬부라진 글씨로 오늘은 좀 힘들었어. 라고 적은 정한에게 지훈은 물었다.

 

「뭐가 형을 그렇게 힘들게 해.」

「나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나. 비밀 친구인데.」

 

비밀 친구. 그게 모든 자물쇠를 푸는 열쇠가 될 순 없다. 다만, 조금 풀어진 마음에 허물어지라고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단어이긴 했다. 정한은 글로 쓰기 힘들다며 투덜대면서도 속상한 일을 털어놓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같은 타이밍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같은 타이밍이라 서로 사랑하게 되니까, 보통 사랑을 기적같이 기쁜 일이라 하는 거지.」

「기적 참 보기 힘드네.」

「좋아하는 사람 생겼구나.」

 

정한은 답이 없었다. 그대로 잠든 것인지 점 하나만 굵게 찍혀 있었다. 비밀 친구가 듣기엔 가장 즐거울 말이 지훈에게는 가시로 다가갔다.

 

“그렇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쌍방향이라면, 그것만 한 기적이 없지.”

 

형과 나도 마찬가지인 거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일방통행이라서, 우리는 비밀 친구지만 기적까진 가지 못하는 거라고. 이런 걸 0번 고백하고 1번 차인 거라고 하던가. 마음을 알릴 생각 없었고, 속앓이를 한 적도 없지만 입안이 쓰긴 했다. 밝힐 생각 없는 마음이 내벽을 소용돌이쳐 지훈의 가슴을 쿵쿵 때렸다.

 

그 신호는 외행성이 다른 모습으로 탈피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껍질이 쪼개지기 직전에 쩍쩍 갈라지는 모습.

 

다음날 일어나보니, 일기장의 모든 글자는 펜으로 벅벅 지운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술김에 밝힌 정한이 여간 부끄러웠는지 그걸 없던 일로 만들려 했던 것 같아서, 지훈은 이후 정한의 사랑에 관해 묻지 않았다. 정한 역시도 힘겨운 날이 많았는지, 한두 줄 제 하루를 요약하고 필담은 나누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한계절이, 두 계절이. 한 바퀴 돌아 1년. 졸업식도 뭣도 필요 없는 이지훈에게 스물이 되는 겨울이 찾아왔다. 뜸하게 나타나는 정한은, 제 졸업식이었던 날에 맞춰 지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

 

「축하해줄 사람 나밖에 없잖아. 청소년 졸업 축하해!」

 

이제 그도 스물. 앞자리가 2가 되었고, 소년을 지켜주는 것은 없었으며,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제 앞길은 제가 책임져야 할 세상에 내동댕이쳐 멀뚱하게 세상을 바라봤다.

 

외딴섬도 결국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인걸. 지훈은 오랜만에 돌아온 정한에게 짧게 고맙네! 스물한 살. 이렇게 적고 눈을 감았다. 때마침, 지훈의 음악을 관심 있게 듣던 이들에게서 연락이 밀려있는 상황이었다.

 

외행성이지만, 결국은 마주 보고 살아야 할 은하의 궤도가 있다면, 그게 정한이 형에게도 닿는 궤적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건 기적일 뿐이다. 정한에게서 연락이 뚝 끊겨버렸으니까.

 

그게 남자라면 다들 가야 한다는 그곳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계절이 지나고서 야! 진짜 남자 혐오 생길 것 같아! 하며 씩씩대는 정한의 글씨 때문이었다.

 

「자기혐오에 점철된 남자가 되었군.」

「남자는 쓰레기야. 더러워.」

 

그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또 그게 영감이 되어서 지훈은 곡을 썼다. 왜, 무채색의 세상을 겪다가 갑자기 번쩍하고 색이 들어왔다가 다시 무채색으로 돌아갈 때의 감정. 뭐 그런 게 영감이 되기도 하더라. 그 곡은 대박이 났다. 비로소 그가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는 시작이 되었다.

 

그게 윤정한의 남성 혐오 때문이라니. 역시 저에게 다가오는 별은 파편을 튀면서 파핑 캔디처럼 저를 자극하지.

 

지훈은 이따금 정한의 일기를 돌아보며, 그걸 음악으로 만들었다. 정한의 인생을 곡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정한의 일기를 보며 들었던 감정을 정제하여 사랑 노래로 만든 것이 컸다.

 

정한의 일기가 늘어나는 빈도는 극히 줄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 발돋움하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어서 네모난 방에 틀어박힌 지훈은 정한을 절대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일기장은 지훈의 작업 일기가 되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작업했음. 어느 소속사에 데모를 보냈으며, 어느 소속사가 편곡을 의뢰했음. 정한에게는 딱히 영양가 없을 기록들이었다.

 

그건 지훈이 정한을 기다리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기다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절대 기다림 따위는 없다 했지만, 그건 기다림이 맞았다. 몇 년 후에 마주한 한 줄 때문에.

 

「지훈아 나 결혼해.」

 

기다림이 맞았다. 그래도 씁쓸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컸다. 정한의 소식 중에서 가장 축하해야 할 소식을 비밀 친구를 굳이 찾아 들려줬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실연? 그런 건 애초에 마주할 일인지라 지훈은 이 끝맺음을 기다린 보람을 위해 열심히 일기장을 돌아봤다. 우리가 나눈 건 뭐였을까.

 

이래도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었을까?

 

사랑한다는 단어 없이도 마음을 나누고, 무너지는 발 아래를 지탱해 주며 곁에 있어 준다는 건, 이래도 우리가 사랑이 아니었을까.

 

첫사랑의 실연은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외면당한 적 없는 마음이라 실연일 수가 없다. 우리는 나름의 사랑을 했다. 그 모든 순간 우리가 맞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축하해. 결혼식 밥 맛있어?」

「이번엔 나 볼 거야?」

「밥 보러 갈 거야」

 

윤정한의 웃음을 딱 한 번 봐서. 이지훈은 여전히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소년의 웃음을 상상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청년이 되었음에도, 이제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지훈이 아는 정한은 반짝이는 눈에 반사되어 더욱 빛이 나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엉뚱한 대답에 정한은 어떻게 웃었을까. 그렇게 웃어주었다면, 웃겨주는 남자가 되었으니 만족한다.

 

정한은 꾹꾹 눌러 담아 주소 하나를 정자로 적었다. 휴대폰으로 그 알파벳을 하나하나 눌러 들어가니 모바일 청첩장이 나왔다.

 

우리는 이렇게나 아날로그의 소통을 했구나. 링크 하나도 정자로 써야 했고, 하나하나 보며 눌러야 했다. 스마트폰 클릭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세상에서 특별하고 독특하고 골때리게도 아날로그 한 문자의 나열이 지훈에게는 위로였다.

 

결국 지훈은 정한의 결혼식에 갔다. 축의금은 당연히 이름 없는 봉투에. 다만 방명록엔 그가 알아볼 글씨를 적었다.

 

「결혼 축하해. 내 첫사랑.」

 

지훈은 정말 밥이 맛있을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에 스쳐 가는 인연처럼 정한을 스쳐 갔을 뿐이다. 비껴가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처럼 여럿의 축복 속에서 환히 웃는. 겨울이 아니라 봄에도 그리 웃는 정한을 슬쩍 바라보고 몸을 돌렸다.

 

누군가가 저를 불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저를 쫓아왔을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서. 소음에 들리지 않는 듯, 원래부터 이곳에 없었던 사람인 듯 인파 사이에 섞여서.

 

“고마워! 지훈아!”

 

모퉁이에 돌아섰을 때, 지훈은 주저앉아 처음으로 울었다. 울렁울렁 체할 것 같은 속은 사실 눈물의 범람이었고, 해가 유독 부신 것은 눈물이 글썽거려 아픈 것이었다고.

 

“뭘 고마워. 누가 결혼식 방명록에 첫사랑 축하한다고 초를 치겠냐.”

 

그 시절 윤정한이 항상 붙이던 말. 오늘 참 재밌었다 그치.

 

“맞아. 형 봐서 오늘 참 재밌었다. 그치.”

 

정한은 이후로 3년을 내리 일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

 

외행성의 삶치고는 꽤 괜찮았다. 방이 좀 더 커졌고, 작업실은 더욱 기계로 가득 찼다. 그럴싸한 녹음실도 생기고, 디렉팅을 받으러 일부러 지훈의 집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곡은 엄청나게 잘 쓰는데, 두문불출이래. 아무래도 예술을 하는 사람은 특이하긴 하지? 사람들이 자와 자와 하는 말이 그리 고깝게 들리진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집밖에 모르는 작곡가. 아주 가끔 미팅 있을 때만 나타나는 작곡가. 우지라고 활동하는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

 

그가 우지가 된 이유는 단 한 줄의 말장난 때문이었다.

 

「우리 지훈이니까, 우지. 좋네.」

「내 친구 편들지 마. 구려.」

「왜? 다들 너 우리 지훈이라고 부른다며!」

 

열아홉의 윤정한이 열여덟의 이지훈에게 장래에 네 노래를 찾아 들으려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나온 상상의 타래였다. 우리 지훈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게 어찌하다 보니 계속 우지로 활동하게 되었다. 딱히 사랑이 지어줘서, 애틋한 이름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오, 잘 부르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엔 제가 회사 녹음실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우르르 빠지고 난 작업실. 치워야 할 것을 치우고, 평소처럼 청소했으며, 따분하게 콜라 한잔을 마시며 마우스로 클릭, 클릭. 오늘의 할 일을 마쳤으니 작업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일기장을 펼쳤을 때였다.

 

「지훈아. 너 아직 일기 쓰네.」

「오랜만이야. 크크…. 나 이혼했어.」

 

윤정한이 결혼 3년 만에 이혼 소식과 함께 일기장을 찾았다. 그의 비밀 친구는 두 줄 외엔 답이 없었다. 마치 지훈의 답을 기다린다는 듯. 지훈은 덜덜 떨리는 손을 한번 철썩 때리고 의연하게 답을 보냈다.

 

「돌싱 축하 기념 일기야?」

「뭐 탓할 것도 있고 그랬어.」

「욕하고 싶으면 해. 그래야 풀리지.」

 

정한은 실시간으로 무언가를 적어냈다. 적어내는 글자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들여다봤지만, 그건 전남편이 된 그 새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따져야 할 사람을 찾아온 거지. 정한의 원망 대상은 이지훈이었다.

 

「나 이혼당했어. 정확히는. 첫사랑 못 잊어서.」

「아, 그 대학교 때 마음이 맞질 않아 어쩌고저쩌고하던….」

「개보다 한참 전인데」

「얼마나 좋아했길래 10년 지나도 못 잊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크게 죽죽 그었다.

 

「ㅗ」

 

그리곤 휘갈겨 쓴 글씨로 지훈의 탓을 엄청나게 해댔다. 너 때문에 나는 재미있는 하루를 잃은 지 오래라며. 그 기점은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날. 유독 밝고 신나는 와중에 저를 슬쩍 보고 멀어지는 까만 롱패딩 덩어리를 보고서.

 

사실 정한은 그를 발견하고 친구들을 다 뿌리치며 교문까지 달렸다. 눈이 와 미끄러워서 넘어지기 직전에도, 그를 부르려고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건, 혹시나, 아주 혹시나 날 찾은 게 아니라면. 그래서 망설였고, 그게 후회로 남은 것은 교실로 돌아갔을 때였다.

 

「졸업 축하해요」

 

정한은 졸업식에서 가장 많이 운 놈으로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핑계 댈 만한 것은 너희랑 헤어지기 싫어서라는 깜찍한 이유였으나, 승철과 지수는 그게 어떤 김밥 같은 놈이 정한의 속을 죄다 뒤집어놓고 가서라는 결론을 내며 만날 때마다 다그쳤다. 그놈이랑 아직도 연락하냐? 이젠 좀 만나라.

 

“걔가 안 만나줄 것 같아.”

“어휴, 답답해.”

“몰라 나 마시고 죽는다.”

 

그리하여 남은 일기가 당사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일기가 되다니. 다음날 벅벅 긁어가며 지워버렸지만, 지훈은 다 봐버렸으니까.

 

주어 없이 말했지만, 그건 지훈에게 향하는 푸념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같은 타이밍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같은 타이밍이라 서로 사랑하게 되니까, 보통 사랑을 기적같이 기쁜 일이라 하는 거지.」

「기적 참 보기 힘드네.」

「좋아하는 사람 생겼구나.」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너라고. 나한테는 얼굴 한번 제대로 보여준 적 없지만 항상 너라고. 이름밖에 모르는 너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 주지 않았다.

 

사랑의 타이밍이 어긋난 것 같아서, 이제는 체념한다는 마음으로 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그래도 지훈을 좋아하던 마음을 잠시 멈추게 만들어서 이 사람이다 싶어서, 영원히 멈출 사랑을 기원하며 결혼하기로 했다.

 

이지훈, 이 개자식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딱 봐도 제 친구 아니다. 부모님 친구도 아니고. 그럼, 남편의 친구인가? 아니. 축의도 방명록도 제 쪽으로 냈으니까. 정한은 다른 이들과 웃다가 급히 방명록을 확인하러 갔다.

 

「결혼 축하해. 내 첫사랑.」

 

그래 이 개자식아, 나쁜 자식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같은 타이밍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행복했겠지. 우리는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거고.

 

어긋난 타이밍인지, 어긋난 표현인지. 정한은 무작정 지훈의 뒤를 쫓았다. 이젠 얼굴도 안다. 그 씁쓸한 웃음도 안다.

 

“고마워! 지훈아!”

 

고마워 지훈아. 나를 사랑해 줘서. 당장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내리 3년을 그 기억 속에서 괴롭게 살 줄 알았더라면, 미친 새끼처럼 붙잡고 같이 도피라도 할 걸 그랬다.

 

이 이야기를 활자로 다 들었냐고? 아니, 한 석 줄쯤 적다가 화가 난 윤정한이 제 분을 삼키지 못하고 숫자 열한 자리를 휘갈겼다. 당장 전화하지 않으면, 작곡가 우지 신상정보 털어서라도 너 찾아갈 거라고. 갑자기 마주한 첫사랑의 흉 폭한 반응에, 지훈은 속절없이 첫사랑의 발닦개가 되었다. 통화연결음이 채 두 번도 울리지 전에 받은 정한은 그동안의 솔직한 이야기를 다 털었다. 울진 않았고, 비속어가 자주 섞였다. 우리 지훈이라고 했다가, 개자식이라고 했다가. 저도 모를 감정의 파도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이제 여기서 솔직하지 못했던 사람은 이지훈뿐이다. 지훈은 이제 결정해야만 했다. 저 때문에 인생의 한 부분을 대차게 조져버린 첫사랑을 향해서.

 

“형. 만나자.”

“드디어? 비싼 얼굴 이제 보여준다?”

“응. 난 어디 사는지 알려줄 수 있고, 형이 있는 곳까지도 갈 수 있어.”

 

지훈이 자의로 밖을 나선다. 정한은 그 무게가 어떠한지 너무 잘 알았다. 하필 지훈이 자의로 밖을 나선 두 번이 윤정한의 졸업식과 윤정한의 결혼식이다. 이제 만나자고 약속한다면, 이지훈을 세 번씩이나 끌어낸 유일한 인간이 되는 거다.

 

“지훈아. 넌 진짜 엉뚱하게 어디 처박힌 외행성 같아.”

“응, 형은 은하계 내에서 잘 도는 별 같아.”

“궤도 이탈해도 될까.”

“충돌하면, 큰일인데.”

 

충돌해서 누구 하나 죽는지 보자. 둘 다 살면, 넌 가만 안 둬. 정한의 말에 지훈은 끅끅대며 웃었다.

 

“내가 형을 만나러 새로운 세상으로 갈게. 형에게는 매일이 익숙한 세상이지만.”

 

외행성이 탈피를 시작한다. 그리고 곧 궤도를 설정한다. 어떤 한 행성의 위성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자존감 다 깎여서 마모된 어른이어도, 이제는 우리가 이래도 사랑이 아니냐는 물음에 답해야 해.”

“모든 순간에, 혹시 무너질 발 아래를 지탱해 줘서 고마웠어.”

“셋, 하면 난 이제 떨어지는 거야. 형의 세상으로”

“그래. 셋 하면. 우리는 놓치지 않고 서로의 위성이 되는 거야.”

 

하나

 

외행성이 추락한다. 빠르게 추락하여 어떤 별과 부딪히기 직전에 그 옆에 붙어 자리 잡는다. 궤도를 벗어난 이탈은 이제 없다. 어쩌면 영원히 돌게 될 길이 생겼다.

 

누군가를 따라서 함께 돌지 않고 유독 하나의 별 주변만을 맴도는 모난 행성. 외행성이 은하로 추락하고, 별의 먼지에 부딪혀 마모된 구석이 있어 모나게 되었으나.

 

“우리, 이젠 만나.”

 

결국 만날 거야.

bottom of page